[금주의 무역인] 백준기 봉화산업 대표
페이지 정보
작성자봉화산업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4-11-30 21:27본문
[▲백준기 봉화산업 대표는 수입 상품이 주도하던 용접봉용 파우더의 국산화에 성공, 지금은 미국·일본 등에 수출한다. [사진=봉화산업]]
경리 출신의 집념이 용접봉 파우더 종주국을 넘다
한때 ‘수입상품 대체’가 국가적 미션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자립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과정은 쉽지 않다. 특히 일본은 여러 분야에서 우리를 압도했다.
하지만 이런 한계를 극복한 기업가들이 존재한다. 백준기 봉화산업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적당히’를 모르는 완벽주의자다. 포기를 모른다. 불굴의 의지로 용접봉용 원료인 파우더에서 종주국인 일본과 캐나다를 제치고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제 선진시장을 뚫고 있다.
백 대표는 해외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해, ‘5년 안에 수출 500억 원, 매출 1000억 원’을 목표로 제시했다.
●경리 부장의 공장장 승진 = 백 대표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중견 섬유기계회사에 들어가 30년간 회계업무를 맡았다. 그는 조용히 업무를 늘렸다. ‘회계’를 무기로 주요 부서를 압박했다. 숫자를 들이밀며 더 높은 효율과 더 낮은 비용을 요구했다.
백 대표는 “재무제표를 보면 현금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당히 수기로 넘어가려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용납을 안 했다”고 말했다.
1주일에 한 번 회장 보고 자리에서는 ‘더 생산할 수 있다’ ‘더 팔 수 있다’고 직언했다. 1980년대 섬유산업 활황기다. 만들면 팔릴 때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즐길 때다.
회계업무도 일이 많다. 여유가 있었을까. 백 대표는 “회계는 질서다. 시간이 지나면 질서는 잡힌다. 그때부터 다른 부서로 넘나다녔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특히 상사와의 갈등이 컸다. 임원 승진에 3년 연속 실패했다. 백 대표는 “회장이 저를 불러 ‘임원 승진을 시키려고 하는데, 임원들이 모두 반대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생산 총괄 공장장이 공석이 됐는데 회장이 임원회의에서 경리 부장이었던 백 대표를 공장장으로 추천한 것. ‘급하니 일단 맡겨보고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찾겠다’고 폭탄 발언을 한 것. 백 대표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경리 부장을 겸직한 백 대표는 공장장으로서 발굴의 실력을 발휘한다. 문제를 개선하고 영업에서도 처음 대기업 물량을 따냈다. 몇 년 사이에 매출 600억~700억 원의 회사를 1000억 원대로 성장시켰다.
●IMF로 퇴사 후 파우더 개발 = 백 대표는 올곧다. 아니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협력사 부도가 속출하자 은행에서 5000만 원짜리 어음에 대해 공장장인 그에게 연대보증을 요구했다.
백 대표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그랬더니 은행 관계자가 회사 회장에게 연락한 것. 회장은 백 대표에게 ‘우리 가족이 아니다’라며 경질했다.
퇴직자가 된 백 대표는 창업을 결심한다. 회사를 위해 몸을 바친 것에 관한 결과가 너무 초라했다. 아이템을 고민하던 중 원재료 수입 판매 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환차익까지 거둬 큰 수익을 볼 수 있었다.
이전 경험을 살려 용접봉 제작사에 합금철 파우더 납품 사업을 결정한다. 파우더의 원료를 수입해 이를 가공해 공급하는 방식이다. 영국 원자재 시장 시세를 보니 해 볼 만했다. 국내 파우더는 일본과 캐나다에서 80%가량 수입했다.
3700만 원 퇴직금에 은행 대출을 끼고 8500만 원을 들여, 경북 김천에 공장을 인수했다. IMF로 인해 헐값에 나온 매물이었다.
●좌절을 맛보다 = 2년간 매출이 없었다. 네덜란드에서 원석 20t을 수입해 파우더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백 대표는 “‘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7명을 고용해 뛰어들었는데 난제들이 겹겹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3년 후 직원 모두를 내보냈다.
그리고 개발이 쉬운 아이템을 찾았다. 정년퇴직을 한 용접공 한 명을 고용해 둘이 함께 피복 용접봉용 파우더(Fe-Si 45%)를 개발했다. 1998년 창업 후 3년 만에 처음 매출이 발생했다.
●파우더 국산화 도전 = 파우더에 대해 이해하자, 이번에는 페로크롬(FeCr)에 도전했다. 당시 100% 수입했던 품목이다. 1~2년 예상했던 개발 기간은 3년이 걸렸다.
백 대표는 “고객이 원하는 일정 기준 이상의 입자가 나와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입자가 나와도 설비가 부서지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노하우를 익혀, 결국은 해냈다.
페로크롬은 봉화산업의 효자상품이다. 시장에 나오자마자 수요가 이어졌고, 덕분에 2009년에는 매출 60억 원을 기록했다. 일본과 캐나다산 파우더를 대체한 것이다.
백 대표는 만족하지 않았다. 2009년 경북 고령으로 옮겨 부지 3000평 규모의 공장을 확보했다. 내수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다.
●품질을 무기로 중국·미국 시장 열어 = 국내에서 수입상품을 대체하자 2010년 어느 날 일본기업이 찾아왔다.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품질이 떨어지지 않고, 가격은 우수했다. 일본회사는 곧 수입을 결정했다.
백 대표는 “일본산과 비교해 10% 이상 저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개척에 힘을 쏟았지만, 쉽지 않았다. 회사와 제품을 알리는 것이 어려웠다.
백 대표는 “세계적인 용접(웰딩) 전시회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외를 두드리던 중 중국에서 샘플 테스트 요청이 들어왔다. 크롬류인 ‘FeCR, FeSi’ 파우더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결과는 좋았다. 백 대표는 “그때 만해도 중국에서 우리 정도 품질의 상품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2021년에 미국 시장 개척에 성공했다. 글로벌 빅3 용접봉 업체에 e메일을 보내고 샘플 테스트를 요청하자, 주문이 들어온 것.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미국 회사 품질관리자 5명이 직접 봉화산업을 찾아왔다. 상품의 품질과 생산 설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백 대표는 “회사를 꼼꼼히 체크하고는 ‘관리가 잘 된다. 매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전했다.
이후 주문량은 급증했다. 처음에는 연간 6억 원 정도 수출했는데 올해는 26억~27억 원에 달할 것으로 백 대표는 예상했다.
[▲미국 수입업체가 대량 주문을 넣기 전, 경북 고령 봉화산업을 찾아와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사진=봉화산업]]
[▲봉화산업은 지난해 백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사진=봉화산업]]
●5년 후 매출 1000억 돌파 기대 = 봉화산업은 용접봉 파우더 분야 일괄 설비를 보유한 국내 유일 기업이다. 일괄 장비를 갖춘 곳으로는 ‘아시아 최고’라고 백 대표는 소개했다.
지난해 매출은 270억 원. 이 가운데 수출 비중은 약 15%다. 백 대표는 “국내 시장은 어느 정도 포화해, 이제는 해외를 뚫어야 한다”며 “5년 안에 수출 500억 원, 매출 1,000억 원을 목표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봉화산업은 매출 확대를 위해 이차전지 분야 진출도 준비 중이다.
봉화산업 인력은 25명이 채 안 된다. 하지만 맨파워는 막강하다.
백 대표는 “직원 이직은 회사에 큰 손실이다. 함께 경험을 쌓은 직원들과 오래 갈 수 있는 가족친화기업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사명 봉화(烽火)는 과거 신호로 올리던 불에서 따왔다. 백 대표는 “봉화처럼 계속 활활 타며 성장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밝혔다.